역사속의 구리시
삼한시대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까지!
구리시의 역사를 알려드립니다.
삼한시대
삼한사회는기원전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형성되었다.
삼한사회는 마한·진한·변한을 지칭하는데 지금의 구리 지역은 마한에 속하였다.
마한의 영역은 지금의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마한은 54개의 국(國)을 포용하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인 고리국(古離國)을 양주·풍양 일대로 추정하는 학설이 있다.
이러한 위치추정은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아직 단정할 수 없다.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 시대
「삼국사기」 백제 책계왕 즉위년(286년) 조에
“왕이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하여 아단성(阿旦城)을 고쳐쌓고 방비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서 이 시기에는 한강 하류 지역이 백제의 땅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 371년 지금의 예성강인 패하와 평양성에서 백제와 고구려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해서도 구리지역을 포함한 한강 유역이 적어도 371년까지는 백제에 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396년(광개토왕 6) 고구려 광개토왕은 백제에 대한 대규모 정벌을 감행하여 백제의 58개 성과 700개의 촌락을 점령하였다.
「광개토왕릉비」에는 그때 고구려가 점령한 성들의 명칭이 나오는데 그중의 하나가 '아단성'이다.
이 아단성을 지금의 아차산으로 비정하는 데는 대부분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군이 당시 백제의 도읍인 한성(오늘날의 경기도 광주)까지 육박한 것으로 보아
지금의 구리 지역과 한강 유역은 고구려 국경 남단에 자리 잡게 되었다.
475년(장수왕 63) 9월 고구려 장수왕은 3만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한번 백제를 공격하였다.
장수왕은 이때 백제의 도읍지였던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아차산에서 죽이는 한편
계속 남진하여 한강 이남의 넓은 지역을 고구려 판도에 넣었다.
이때 구리지역은 북한산군(北漢山郡 : 지금의 서울지역) 관내인 골의노현(骨依奴懸 : 지금의 남양주시 진접과 진건 일대)에 속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후 한동안 한강 하류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는데,
551년(성왕 29) 신라와 백제 연합군이 한강 유역을 공격하여 이를 차지함으로써 한강 하류 지역은 다시 백제의 땅이 되었다.
그러나 불과 2년 후인 553년(진흥왕 14)에 신라가 한강 하류 지역을 공격하여 이 지역은 또다시 신라의 영역으로 바뀌었다.
신라는 757년(경덕왕 16) 북한산군 지역(지금의 서울지역)에서 한양군을 설치하고
현재 남양주시 진접ㆍ진건지역을 골의노현에서 황양(荒壤)으로 개칭하였다.
황양은 한양군에 속하였는데, 지금의 구리지역도 이곳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후삼국 시대
898년
"양주"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난다.
고려 시대
고려 시대 현 구리지역은 양주 또는 남경 담당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 양주의 변화를 살펴보면 통일신라 시대 한양군이었던 지금의 서울 지역은 고려 초기 양주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그 뒤 983년(성종 2) 12목 지방 제도를 만들 때 양주목(牧)이 되었다.
995년(성종14) 다시 지방 제도를 개편하여 10도제와 12절도사제로 개편될 때,
양주는 관내도(경기, 황해도지역)에 속했다.
이때 고려 조정은 양주를 좌신책군(左神策軍), 해주를 우신책군(右神策軍)이라 하여 좌우 2보(輔)로 삼았다.
1012년(현종 3)에는 2보와 12정도사를 폐지하고 안무사(安撫使)를 두었으나
1018년(현종 9) 양주는 다시 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된다.
그 후 1067년(문종 21) 남경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되었다가 곧이어 격하되고
숙종 때 다시 남경으로 승격된다.
이때 구리지역도 남경의 직할지가 되었다.
이후 1308년(충렬왕 34) 남경은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었다.
현재의 구리지역에 대한 더 자세한 연혁은 아직까지 알 수 없다.
조선 시대
- 1394년(태조 3)지금의 서울지역인 한양부에 도읍이 들어서면서 한성부라 개칭하고 양주의 치소를 아차산 남쪽 대동리(지금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추정)로 옮겼다. 1394년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되었다가
- 1395년(태조 4)양주부로 승격되었다.
- 1397년(태조 6)양주의 치소를 고주내(지금의 양주시 고읍동)로 옮겼다.
- 1410년(태종 10)양주목으로 승격되었다.
- 1413년(태종 13)양주도호부로 강등되었다.
- 1466년(세조 12) 다시 양주목으로 승격되었다.
- 1504년(연산군 10)양주목을 폐지하고 왕의 사냥터를 만들었다.
- 1506년(중종 1)또다시 양주목으로 복구되고 치소를 불곡산 남쪽 (지금의 양주시 유양동)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유양동은 양주의 관아가 있는 중심지로 자리 잡았고, 여기에서 지금의 구리지역까지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40~60리 떨어진 지역이었다. '구지'라는 명칭이 1530년(중종 25)에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양주목 구지(龜旨)면’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나타난다.
- 1895년(고종 32)부군제 실시에 따라 한성부 양주군에 소속되었다.
- 1896년(고종 33)) 13도가 설치되면서 경기도 양주군에 소속되었다.
1912년 발간된 「구한국지방 행정구역 명칭일람」에는 일제에 강제 합병되기 전 양주군에 편제되어 있던 32개 면이 나와 있다. 그리고 각 면에 속한 마을도 나와 있는데 이에 의하면 구지면은 사노리(四老里), 인장리(仁章里), 수택리(水澤里), 백교리(白橋里), 토막리(土幕里), 동창리(東倉里), 이문리(里門里), 평촌리(坪村里), 아차동(峨嵯洞), 우미천리(牛尾川里) 등 10개 마을이 있었다. 이러한 10개 마을은 조선 중기 이래 구지면을 구성하고 있던 기본적인 마을이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후 1914년에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현 명칭인‘구리(九里)’는 이때 생겨났다.
즉, 이때의 행정구역 통폐합 시 구지면의 10개 리(사노리, 인장리, 수택리, 백교리, 토막리, 동창리, 이문리, 평촌리, 아차동, 우미천리)와 망우리면의 15개 리(묵동리, 신현리, 능후동, 방축리, 직곡리, 봉황동, 내동리, 능내동, 양원리, 입암리, 봉현리, 상리, 중리, 하리, 능곡리), 그리고 노원면의 장기리와 갈매동, 미음면의 수변리와 석도리 각 일부, 진관면의 배양동 일부, 별비면의 퇴계원리 일부를 병합하여 구지의 "구(九)"자와 망우리의 "리(里)"자를 따서 구리면이라 하였다.
개편된 구리면에는묵동리(墨洞里), 중하리(中下里), 상봉리(上鳳里), 신내리(新內里), 망우리(忘憂里), 인창리(仁倉里), 사노리(四老里), 교문리(橋門里), 수택리(水澤里), 토평리(土坪里), 아천리(峨川里), 갈매리(葛梅里) 등 12개 마을이 편제되었으며,
면사무소는 교문리에 두었다.
대한민국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구리면의 행정편제는 별다른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교문리에 있던 면사무소는 1950년 한국전쟁 때 완전히 파괴되어 1952년 4월 이후부터는 망우리에 면사무소를 두었다.
그 후 1955년 8월 10일에 구리면사무소가 인창동의 옛 구리시청 자리에 신축되었다.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구리면의 행정편제는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하여 묵동, 중하, 상봉, 신내, 망우 등 5개 리가 분리되어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양주군 구리면에는 인창리, 사노리, 교문리, 수택리, 토평리, 아천리, 갈매리 등 7개 리만 남았는데
이로써 구리면은 그 지역적 범위가 일제에 의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행 이전의 ‘구지면’ 정도로 축소되었다.
구리면은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3호에 의하여 읍으로 승격되었다.
군 편제에서는 그대로 양주군에 속해 있다가 1980년 4월 1일 법률 제3169호에 의하여 양주군에서 분리된 남양주군에 소속되었다.
구리읍은 해마다 인구가 증가하고 발전을 거듭하여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의해 남양주에서 분리되어 시로 승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