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천하의 중심이 되다.
광개토대왕 시대는 5호16국시대로도 불리던 북중국의 분열시대가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서진(西晉) 멸망과 함께 북중국에 밀려든 흉노, 선비, 갈, 저, 강 등등 다섯 이민족이 번갈아, 또는 동시에 세웠던 나라가 120년 동안 16개였고, 이 가운데 광개토대왕 재위 당시에 존재했던 나라만 7개였다.
북방 이민족이 세운 나라들은 때로는 북중국의 패권을 잡기 위해, 때로는 왕조 유지 차원에서 서로 복잡하게 얽힌 외교관계를 맺었다.
세력을 키우기 위한 전쟁과 동맹이 되풀이되었고, 기존의 강국이 새로운 강자로 대체되는 일이 빈번이 일어났다.
중국의 하북, 요녕 지역에 세워진 나라들은 동방의 강자 고구려를 제압한 다음 중국의 중심, 곧 중원으로 불리던 지역으로 진출하려고 애썼다.
때문에 서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애쓰던 고구려와 이들 5호 왕조들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18세의 나이로 고국양왕의 뒤를 이은 왕자 담덕, 광개토왕은 즉위하자 곧바로 군사를 이끌고 백제 공격에 나선다.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숙적 백제였기 때문이다.
광개토왕의 고구려군이 한강 북쪽의 백제 영토를 유린하고, 한강 하류의 요새 관미성을 함락시킨 데 이어 수도 한성마저 포위하자 백제 아신왕은 '앞으로 길이 고구려를 섬기겠다.'는 맹세를 하고 많은 인질을 넘겨준다.
백제를 제압한 데 이어, 서북으로 거란, 동북으로 숙신 정벌에 나서 성과를 거두고 선비족 모용씨의 나라 후연(燕)이 버티고 있는 요동으로 눈길을 돌리려는 광개토왕에게 남쪽의 신라로부터 구원군을 요청하는 사절이 급히 올라온다.
399년 백제의 후원을 받은 가야 - 왜 연합군이 신라를 침공하여 서울 금성(경주)을 포위하는 일이 발생하였던 까닭이다. 광개토왕은 군사 5만을 남으로 멀리 내려 보낸다.
생각지도 않았던 북방 강국 고구려 대군의 개입으로 가야 - 왜 연합군은 궤멸되고 신라는 멸망의 문턱에서 살아난다.
오히려 김해에 있던 가락국의 본거지가 쑥밭이 되자 많은 수의 가야인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왜군들과 함께 바다 너머 일본으로 건너 간다.
이때부터 금성에는 고구려군이 주둔하게 되고 신라는 고구려의 조공국이 된다.
남방 평정을 마친 광개토왕은 400년 이후 요하 동쪽과 서쪽을 차지하고 있던 후연에 대한 정벌을 시작한다.
요동 공략이 이루어지고 요하 너머로 군사작전의 범위가 넓어진다. 한 때 후연의 반격을 받기도 하지만 고구려는 결국 후연을 제압하고 요하 너머로까지 영토를 확대하는 데에 성공한다.
22년에 걸친 재위기간 동안 광개토왕은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진정한 강자로 여겨지게 만들었다. 광개토왕시대의 고구려군은 서북으로는 대흥안령산맥 동쪽 언저리 거란 사람들의 유목지대에 이르렀고 서로는 요하를 넘었다.
동으로는 동만주의 삼림지대를 지났고 남으로는 한강과 낙동강 일대에 다다랐다.
광개토대왕 시대의 고구려군은 더 이상 귀족들이 이끄는 '부'소속 군대의 연합체가 아니라 왕이 직접 통솔할 수 있는 중앙 직속군대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왕이나 군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군대로 재편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 시대의 고구려군은 보병, 기병, 수군으로 세분되어 훈련 받았으므로 전투능력이 크게 높아진 상태였다.
또한 당시 고구려는 제철, 제련기술이 크게 발달하여 방어력이 좋은 무장기구, 공격력이 뛰어난 무기를 만들어 군에 보급할 수 있었다.
고구려의 기병에는 기사뿐 아니라 말까지 갑옷과 투구로 무장시켜 철기로 불리던 중장기병부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철기가 쓰던 갑옷은 작은 철판에 구멍을 뚫어 가죽 끈으로 서로 연결한 철제비늘갑옷이 주로 사용되었다.
철제비들 갑옷은 가벼우면서도 충격에 잘 견디도록 만들어졌다.
고구려군이 사용한 철제 무기들도 주변 경쟁국가의 병사들이 쓰던 것보다 여러 면에서 질이 좋고 우수했다.
한강변 구의동 보루에서 발굴된 고구려군의 화살촉과 도끼는 초강(妙)을 소재로 만들어졌으며, 탄소 함량이 0.86%에 달하는 고탄강 (高興)으로 오늘날의 공구강 수준에 맞먹는 강도를 지닌 것으로 밝혀졌다.
질적으로 매우 우수한 철제 무기, 투구, 갑옷으로 무장하였고, 분야별로 전문적인 전투훈련을 받은 군인들이 작전능력이 특히 뛰어났던 왕의 지휘를 받으며 전쟁터로 나아갔던 것이다.
413년,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장수왕이 즉위할 즈음 북중국의 오랜 분열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북연, 북량 같은 나라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선비족 탁발부가 세운 북위(北魏)의 최종 승리가 거의 확실해지고 있었다.
요서(遼西)에 중심을 두고 있던 북연(北燕)이 멸망하면 고구려와 북위가 국경을 맞대게 될 참이었다.
고구려는 앞으로 전개될 국제정세의 큰 흐름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광개토대왕 시대의 성공적인 대외 정복활동으로 말미암아 고구려는 이미 제국이라 부를 정도로 큰 나라가 되어 있었다. 수도 국내성은 늘어나는 인구와 넘치는 물자를 감당 하기에는 너무 좁았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 시대부터 사실상 제2의 수도로 기능하던 평양으로 서울을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400여 년 동안 고구려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이던 국내에서 평양으로 서울을 옮기는 대역사가 시작되었고, 427년 평양은 고구려의 새 수도로 내외에 선포되었다.
436년, 마침내 북위군과 고구려군이 북연의 수도 용성(龍城, 화룡성] 에서 마주치는 사태가 일어났다.
북연왕 풍홍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용성을 향해 진군했던 2만의 고구려군은 북위군보다 먼저 성 안으로 들어가 왕과 귀족, 일반민들로 구성된 대규모 망명행렬을 이끌고 성을 나왔다.
여러 가지 병장기와 보물을 실은 수레와 일반민, 고구려군으로 이루어진 대 행렬의 길이만 80여 리에 이르렀다. 고구려군의 위세에 압도된 북위군은 이 행렬을 저지하지 않았다.
북중국 통일을 눈앞에 둔 북위로서는 동방의 강자 고구려와 굳이 일전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용성에서 두 나라 군대가 마주친 사건을 계기로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는 서로의 힘과 세력권을 인정하는 평화적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
재기를 시도하던 풍홍의 처리를 둘러싸고 북위, 남조의 송(宋), 고구려 사이에 잠시 갈등이 일었지만 이 역시 곧 일단락되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인구와 잘 훈련된 군대를 자랑하던 북위 견제를 위해 고구려와 송이 한 발씩 양보하기로 타협이 이루어진 까닭이다.
이로써 동아시아에는 동방의 고구려, 북방의 유연(然), 중국의 남조와 북조로 이루어진 4강 중심의 국제질서가 자리 잡게 되었고, 동북아시아는 고구려의 세력권으로 국제적 공인을 받게 되었다.
서쪽 국경이 안정되자 장수왕은 적극적인 남진정책을 펴나갔다. 433년 이래 신라와 백제가 나제동맹을 맺어 북방 강국
고구려로부터의 위협에 적극 대처하자, 장수왕은 475년 크게 군대를 일으켜 백제 정벌에 나선다.
장수왕은 남으로 백제를 치기에 앞서 북위와 외교관계를 재개함으로써 서부 국경지대를 더욱 안정시킨다. 이어 승 도림(道林)으로 하여금 백제에 거짓 망명하게 한다.
도림은 뛰어난 바둑 실력으로 백제 개로왕의 신임을 얻은 다음 왕으로 하여금 성곽과 궁실을 장려하게 고쳐 짓고, 왕릉을 새로 만들며 하천에 큰 제방을 쌓게 하였다.
왕실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고자 시작된 사업이지만 대규모 공사로 백제의 재정은 고갈되고 백성들의 생활은 피폐해졌다.
백제에서 국수(國手)로 존경 받던 도림이 몰래 고구려로 되돌아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장수왕은 곧바로 백제 정벌군의 출병을 명령한다.
고구려군은 한성을 함락시키고 백제의 개로왕을 죽인 뒤, 한강 이남지역까지 밀고 내려간다. 백제는 결국 한강일대를 포기하고 웅진(공주]로 수도를 옮기고 만다.
장수왕은 481년 고구려군을 금성 북쪽까지 치고 들어가게 하여 신라로 하여금 동북아시아에서의 고구려의 패권적 지위를 재확인 시킨다.
64년 동안 계속된 장수왕의 시대에 고구려의 영역은 계속 확장되었다.
동몽골과 만주의 경계지대에서 목축생활을 하던 지두우 땅의 동부가 고구려에 합쳐졌고, 한강 이남의 평야지대 일부가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었다.
돌궐과 고구려에 의해 분할 점령된 지두우는 더 이상 독립세력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고, 백제는 한성시대를 마감하고 금강유역으로 밀려 내려갔다.
만주 동북 삼림지대의 말갈사회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고 그 범위도 확대되었다.
말갈의 여러 부족 가운데 흑룡강 일대의 흑수부만 고구려의 영향력 바깥에 남게 되었다.
원고: 전호태(울산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