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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멸망

수, 당에 맞선 70년, 갈등, 멸망, 계승

장수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문자명왕 시대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외확장은 정체상태에 빠져들었다. 동북의 물길에 쫓긴 부여 왕실이 고구려로 망명하여 온 것을 끝으로 고구려의 영토 확대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중앙 및 지방의 관직을 둘러싸고 귀족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나아가 왕위계승을 둘러싼 귀족세력 사이의 무력대결까지 일어났다. 고구려 지배층 안에서 세력이 나누어지고 갈등이 심화되는 동안 남쪽에서는 신라가 고구려 대왕의 지배에서 벗어났음을 선언하며 백제와 힘을 합쳐 한강유역으로 치고 올라왔다. 300여 년에 가까운 중국의 분열시대도 끝나가고 있었다. 577년, 북주(北周)를 대신한 수가 북제(北齊)를 무너뜨리고 북중국을 통일한 데 이어 남조의 진(晉) 정벌에 나서려 한다는 소식이 고구려에 전해졌다. 중국 통일왕조의 등장이 눈앞의 현실이 되자 고구려 귀족들은 내분을 그치고 공존을 전제로 한 타협안을 마련하였다.
왕과 귀족들은 말갈이나 거란 사람들에 대한 통제를 다시 강화하면서 4강시대의 경험에 바탕을 둔 '수' 포위 외교 전략을 수립하고 고구려의 사신들을 돌궐과 진으로 파견하였다. 589년 진의 수도 건강이 수군(隋軍)에 함락됨으로써 중국의 남북조 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걱정했던 대로 중국에 통일왕조가 출현한 것이다.
동서로 분열된 북방의 유목제국 돌궐마저 수에 제압되었지만, 고구려는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수에 대한 선제공격에 나섰다. 598년 영양왕이 이끄는 말갈군 1만이 수의 요서 지역을 공격하였다. 수 역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3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고구려와 수 사이에 20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30만 명이 동원된 수의 1차 고구려 공격은 요하에서 저지되었다. 612년, 수는 다시 전투병만 113만 명에 이르는 대군을 고구려 공격에 동원하였다. 보급병까지 300만에 이르는 대군이 요하를 건너 요동성에 이르렀지만 성은 말 그대로 난공불락이었다. 30만 명의 별동부대가 평양성을 향해 진격했지만 결국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전략에 말려 살수(薩水)에서 전멸 당했다. 황해를 건너 온 수의 수군도 왕자 건무가 지휘하는 고구려 수군에 의해 궤멸 당했다. 613년, 614년에도 수의 대군이 요하를 건너왔지만 고구려군은 성을 굳건히 지켰고 수군이 많은 전사자를 남겨두고 철수하게 만들었다.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정복을 위한 군사 동원이 계속되자 수의 곳곳에서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수 왕조는 멸망하였다.
수가 멸망한 618년, 고구려에서는 왕자 건무가 왕의 자리에 올랐다. 26대 영류왕이다. 왕은 거듭된 수와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추스르기 위해 수를 이은 당과 평화사절을 교환하는 한편 국경지대에는 천리장성을 쌓아 만약에 대비하고자 했다. 일부 백성들을 직접 거느리던 상급 귀족들도 통제하여 떨어졌던 왕의 위상도 새롭게 하려 하였다. 대를 이어 귀족세력의 대표 자리에 올랐던 연개소문 집안이 우선적인 통제 대상으로 떠올랐다.
642년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로 새로 임명 받았던 연개소문이 현지에 부임하지 않고 왕도(王都)에 남아 있다가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이로 말미암아 영류왕의 여러 가지 시도는 물거품이 되었다. 귀족 180여 명과 함께 왕도 죽음을 당해 그 시신이 도랑에 버려졌다. 오직 무력에만 의지한 연개소문 일파의 독재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644년 10월, 당군이 고구려 국경을 넘기 시작하였다. 연개소문의 정변을 벌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명분을 내건 침공이었다.

당군은 약 3개월 만에 요동전선의 주요 방어거점이던 개모성, 요동성, 비사성, 백암성을 함락시킨다. 이어 요동지역 구원에 나선 15만의 고구려 중앙군마저 무너뜨린다. 이제 안시성만 함락시키면 당군이 압록강을 곧바로 건너도 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나 당군을 직접 지휘하던 당 태종의 기대와 달리 안시성은 구원군 없이 수개월이 지나도록 대군의 포위공격을 견뎌냈다.
안시성의 성주와 군사, 백성들은 섣불리 성 밖으로 나와 수적으로 우세한 적과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성을 지키는 데에 힘을 쏟기로 하였다. 당군은 안시성 동남쪽에 흙산을 쌓기 시작했다. 60여 일에 걸쳐 연인원 50여 만 명이 동원된 대공사가 끝날 즈음 흙산은 성벽 보다 높아져 있었다. 그러나 이 흙산은 곧 고구려군에 빼앗기고 말았다. 문득 넓은 요동평원 북편에서 찬바람이 불어왔다. 계절이 바뀐 것이다. 물이 얼기 시작하고 식량은 거의 바닥이 나자 당 태종은 입술을 깨물며 당군에 철수를 명령한다.
당 태종이 고구려 정벌 실패를 곱씹고 있던 648년, 신라의 실권자 김춘추가 당나라로 건너간다. 백제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고구려의 도움을 청했지만, 연개소문으로부터 거절당한 뒤에 일어난 일이다. 신라는 백제를, 당나라는 고구려를 역사지도에서 지우기 위해 서로 돕기로 하는 군사동맹이 두 나라 사이에 맺어진다. 김춘추가 '백제를 먼저 무너뜨린 다음 고구려를 공격하자고 제의했고, 당 태종이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660년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무너뜨리는 데에 성공하자, 당군은 거의 매년 평양성을 향해 진군했다. 군량미를 신라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었으므로 당군으로서는 최대의 약점이었던 식량에 대한 걱정이 없이 전투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665년, 독재자 연개소문이 죽자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의 세 아들 가운데 누구를 후계자로 세우는지를 두고 귀족들 사이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먼저 맡아를 남생이 권력을 잡았지만 오래지 않아 두 동생에게 밀려났다. 국내성에 머물던 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했고, 신라와의 국경지대를 책임지던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자신이 맡았던 성과 백성들을 적국 신라에 넘기면서 망명하였다.
668년, 신라의 보급부대가 수레 수 천대에 식량을 싣고 다시 한 번 평양성을 향해 출발했다. 당군은 투항한 연남생을 길잡이로 삼아 요동 방어선을 돌파하고 견고한 고구려의 성들을 하나하나 공략하기 시작했다. 신성, 부여성 등 큰 성들이 차례로 무너졌다. 안시성을 비롯한 몇몇 방어거점들이 아직 건재했지만 당과 신라의 대군에 포위된 평양성의 고구려군은 점차 지쳐갔다. 668년 9월, 보장왕은 항복하겠다는 뜻을 당군 사령부에 알리고자 연남건과 귀족들로 하여금 성문을 열고 나가게 하였다. 이로써 700여년에 걸친 고구려의 역사는 일단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평양성 함락 후, 고구려의 귀족들과 유력자, 기술자들 대부분은 당으로 끌려가 여러 지역에 강제로 흩어져 살아야 했다. 다른 일부는 돌궐이 지배하던 몽골초원으로, 바다 건너 일본으로 삶터를 옮겼다. 그러나 고구려 옛 땅에 남아 있던 다수의 유민들은 군사동맹을 깨고 상호 전쟁상태에 돌입한 신라와 당 사이에서 신라의 이면 지원을 받으면서 적극적으로 부흥운동을 전개한다. 676년, 당과 신라가 상대 세력권을 인정하면서 화의를 맺자 부흥운동 세력의 일부는 통일신라에 영역으로 넘어가 그 땅의 백성이 되고, 다른 일부는 만주 지역에 남아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다. 692년 요서의 영주에서 시작된 거란의 반란을 계기로 삼아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이 다시 본격화 되고 그 흐름은 698년 고왕 대조영의 발해 건국 선언으로 열매를 맺는다.
멸망 30년 만에 고구려의 옛 땅에서 700년 고구려사의 계승을 선언한 새 나라 발해가 첫 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원고: 전호태(울산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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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4-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