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인이 생활하던 집이야기
고구려 귀족의 저택은 중문(中門)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와 안채로 나뉘어 있었다. 바깥채, 곧 사랑채에서는 공적인 업무가 처리되었고 안채에서는 일상생활이 이루어졌다. 귀족의 저택에는 거처와 부엌 외에도 외양간, 마구간, 방앗간 등등 여러 가지 기능을 갖춘 부속건물이 갖추어져 있었다. 부엌의 시루 걸린 부뚜막과 갈퀴 발 달린 소반, 마당의 용두레 우물, 방앗간의 디딜방아, 다락집모양의 창고, 코뚜레를 꿴 외양간의 소 등은 아직도 우리나라의 농촌 일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경이다. 저택의 실내에서는 평상(平床)이나 좌상(坐床)생활이 보편적이었다. 평상은 의자에 비해 앉는 자리는 넓으나 다리 길이는 짧게 만들어 온돌로 된 방바닥과 가깝게 하였다. 이외에 저택 안에 마련된 거실과 같은 공간에서는 의자생활도 이루어졌음이 각저총과 무용총벽화를 통해 확인된다.
집안의 난방은 벽을 따라 설치된 온돌을 통해 해결하였다. 온돌은 고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며, 고구려시대에 이르면 특정한 용도의 집 짓기에는 고려되어야 하는 요소의 하나가 된다. 비교적 길고 추운 겨울을 견뎌내야 했던 고구려 사람들은 흙으로 마감된 방바닥의 일부를 데워 방안의 공기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게 하는 이 새로운 난방방식을 보다 적극적으로 개발시켜 나간다. 유적을 통해 확인되는 초기 단계의 온돌은 방바닥의 한쪽 벽에 붙여 '-'자 혹은 'ㄱ'자 꼴로 고래를 만들어 한쪽 끝에서 불을 때면 열기와 연기가 고래를 타고 지나다가 다른 쪽 끝에 설치된 굴뚝을 통해 빠져나가게 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아궁이에서 마른나무와 같은 연료를 태워 발생되는 연소 열이 굴[터널]을 이루며 바닥 밑을 지나는 고래 위쪽의 편평한 돌을 데워, 그 열이 방의 흠 바닥으로 전달됨으로써 방바닥의 공기가 데워지고, 데워진 따뜻한 공기는 위로 올라가고, 위의 찬 공기는 아래로 내려와 구들돌 및 흙 바닥의 열로 다시 데워져 위로 올라가는 대류현상이 발생함으로써 방안에 있는 사람이 온기를 느끼며 지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구려의 온돌은 중국 길림성 집안시 외곽의 동대자(東台子)유적과 북한 함경도 오매리 절골유적 등에서 잘 볼 수 있으며, 최근 조사된 서울 아차산의 고구려보루에서도 같은 형태의 온돌이 많이 발굴되었다. 온돌을 집 구조의 주요한 부분으로 여기도록 만든 고구려의 바닥난방법은 서쪽으로는 북중국 일대, 남쪽으로는 신라와 백제로 전해지면서 지역별 기후조건, 생활조건에 맞도록 개발되고, 변형된다. 일정한 기술과 적절한 비용이 요구되었으므로 고구려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초기에는 온돌이 제한적으로 보급되고 설치되었다. 궁성이나 사원, 관청, 귀족의 저택에서는 온돌이 널리 사용되었고, 방바닥의 온돌 설치 면이 넓었지만, 일반 백성의 가옥에서는 온돌의 사용이 드물었으며, 온돌 설치 면도 좁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