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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성장 1

동북아시아의 패자를 향한 여정

고구려 건국의 기운은 압록강 중류 유역에 자리 잡고 살던 구려사람들의 중국 한의 군현 쫓아내기가 30년 만에 열매를 맺으면서 보이기 시작하였다. 토착세력들의 반발을 견디지 못하고, 군현이 설치된 기원전 107년부터 한 세대 만인 기원전 75년 한은 현도군을 압록강 중류지역으로부터 서북쪽의 소자(蘇子河) 방면으로 옮기고, 결국 요동 방면으로 후퇴시킨다. 이에 따라 졸본과 국내 일대에는 구려사람들의 지역별 소국연맹체가 성립된다. 부여를 떠난 주몽 일행이 비류수 유역에 이를 즈음 송양국( NASA)은 이러한 소국연맹체들 가운데 하나로 비류수 유역 소국연맹체 대표를 자임하던 나라였다.
주몽은 송양왕의 왕녀 소서노와 결혼한 뒤 나라의 힘을 키워 나가기 시작하였다. 오래지 않아 송양국의 지배자 주몽은 '나국으로 불리던 압록강 중류 일대의 작은 나라들 가운데 규모와 힘에서 앞섰던 다른 '대나국(큰 나국' 들과 힘을 모아 더 큰 나라를 세우게 된다. 바로 고구려의 건국이다. 고구려 땅의 커다란 다섯 세력과 보다 작은 세력들 여럿이 모여 나라를 이루었으므로 새 나라 고구려에서 가장 중요시 되었던 것은 어우러짐과 하나됨이었다. 한 해 한 번씩 온 나라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큰 모임, 알게 모르게 흩어졌던 질서를 다잡고 자신들이 새 나라 고구려의 백성임을 되새기는 큰 만남의 장, '동맹제'를 열게 된 것도 이런 까닭이다. 늦가을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동맹' 때에는 고구려의 모든 귀족과 대인(大人)이 한 자리에 모였다. 각 세력을 대표하는 귀족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나라의 중대사가 논의되었고 또 결정되었다.

반역을 포함한 국가적 차원의 주요한 범죄에 대한 판결도 이때에 이루어졌다. 주몽왕의 뒤를 이은 유리명왕(琉璃明王)은 기원3년 높고 험한 산들로 둘러싸였지만 이웃한 선비족이나 부여로부터 침입을 받기 쉬울 뿐 아니라 도시로서의 발전 가능성에 한계를 안고 있는 졸본을 떠나 '국내'로 서울을 옮겼다. 방어에도 적합하고 압록강을 이용한 교통상의 이점도 안고 있는 국내성을 서울로 삼은 뒤 고구려는 적극적인 대외정복에 나선다. 대무신왕(大武神王)은 즉위하자 곧바로 시조 주몽을 모시는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워 민심을 하나로 모은다. 고구려의 빠른 성장을 염려한 부여의 침입을 물리친 뒤, 대무신왕은 동부여 원정군을 일으킨다. 대소왕을 전사시키는 등 동부여의 기세를 꺾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만주 남부와 한반도 북부에 있던 예맥 사람들의 나라들 가운데 신흥 국가 고구려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호동왕자의 활약으로 남방의 낙랑국이 정복된 것도 대무신왕 때의 일이다. 고구려가 국가로서의 체제와 모습을 갖추어 나가면서 대나국으로 불리던 나부의 지배자에게는 패자(者), 나국의 대표자에게는 우태(優台), 나 집단 규모의 유력자에게는 조의(조) 등의 관등이 주어졌다. 고구려 안의 크고 작은 집단의 유력자들은 가(加)'로 불렸는데, 이들의 모임인 '여러 가(加)들의 회의' 곧 제가회의(加會議)'는 한동안 국가적 의사결정을 위한 회의기구 역할을 담당했다.
물론 제가회의에서의 발언권은 지위의 높낮이에 따라 부여되었다. 회의에 참석하는 가들 가운데 세력이 큰 대가(大)들은 책(책)을 쓰고, 세력이 작은 소가(加)들은 고깔처럼 생긴 절풍(折風)을 써서 상대의 신분과 지위를 알게 하였다. 6대 태조왕(太祖王)은 대외정복활동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여 고구려군으로 하여금 동쪽으로는 개마고원을 넘어 동옥저와 북옥저로 나아가게 하고 서쪽으로는 현도군과 요동군의 도시들에 말발굽이 미치게 한다. 왕이 직접 나선 정복전쟁이 계속되고 정복지가 점차 확대되자 왕의 권력은 이전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대해졌다. 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보았다.'고 전하는 태조왕은 이름 그대로 고구려를 '다섯 대나국의 모임'에서 '왕국으로 전환시킨 태조가 되었다.
2세기 말에는 정복전쟁 등과 관련하여 국가로부터 자주 부역에 동원되거나, 공납물을 마련하느라 살기 어려워진 사람들, 천재지변 등으로 농사를 망쳐 떠돌아다니면서 구걸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194년 가을, 사냥을 나가던 고국천왕은 길가에서 울고 있는 한 젊은이를 만나 그 까닭을 묻는다. 젊은이가 '저는 날품을 팔아 어머니를 모시는데 올해는 흉년이 들어 품팔이를 할 수 없어 새 왕인 중천왕(中川王)이 이러지 못하도록 하자, 장례일에 왕의 무덤에 이르러 스스로 죽은 자가 많았다고 한다.

3세기 전반에도 고구려에는 순장의 관습이 남아 있었기에 일어난 일이다. 3세기 후반부터 고구려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체제 수립을 향해 나아간다. 왕은 왕권을 바탕으로 나부를 더욱 강력히 통제하려 하였고, 이미 독자적인 관원조직을 가동시키기 어려워지고 있던 나부의 유력자들로서는 왕에게 보다 가까운 귀족, 곧 측근세력이 되는 것이 유리해졌다. 나부 아래에 존재했던 관원조직은 국가조직의 일부로 흡수되었고, 국가기구가 나부의 백성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전의 나부는 보다 세분화된 지방행정구역으로 바뀌었다. 강을 따라 형성된 골짜기를 단위로 '곡(谷)'이라는 행정구역이 설정된 것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이다. 주요한 교통로를 따라 행정구역이 설정되고 성곽이 축조되기도 하였다. 주요 행정구역별로 지방관이 파견되고, 군대 주둔이 이루어진 것도 이 무렵이다.
곡식 한 줌도 얻을 수 없기에 이렇게 울고 있습니다. 하고 답하자 왕은 자신의 부족함을 한탄하고 옷과 음식을 주어 그를 위로한다. 이어 관리들로 하여금 홀로 서지 못하는 자들을 널리 구제하고 돌보게 하고 가난한 백성들이 노비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봄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한 해의 추수가 끝나면 갚게 하는 진대법( 法)의 실시를 명한다. 고국천왕의 뒤를 이은 산상왕(上王)은 고국천왕의 왕비였던 형수 우씨와 결혼했다. 우씨는 아직까지 형제 상속의 관행이 남아 있던 고구려에서 제 1 왕위계승권자인 고국천왕의 맞동생 발기(勃起)를 제치고 연우(延)가 왕이 되도록 도왔던 사람이다. 물론 형이 죽었을 때에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 형의 가족을 책임지는 형사취수제(兄死取制)는 고구려의 오랜 관습이었다. 그러나 2대에 걸쳐 왕비로 군림했던 우씨가 죽으면서 전 남편 고국천왕 곁이 아닌 산상왕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긴 데에서 알 수 있듯이 3세기 초쯤에는 동생의 형수 맞이 관습도 고구려에서 서서히 사라진다.
3세기에 들어선 지 오래지 않아 중국은 다시 분열되어 삼국시대에 접어들었다. 동천왕(東川王)은 중국의 정세가 불안정함을 보고 요동으로의 진출을 모색하였다. 이미 중무장한 철기(鐵騎) 5천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나라가 된 고구려로서는 분열된 중국의 힘이 미처 닿지 않는 요동 정복도 시도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242년 고구려는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지만 오히려 위()의 장수 관구검(?丘儉)의 역공을 받아 큰 위기를 맞게 된다.

관원조직은 국가조직의 일부로 흡수되었고, 국가기구가 나부의 백성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전의 나부는 보다 세분화된 지방행정구역으로 바뀌었다. 강을 따라 형성된 골짜기를 단위로 '곡(谷)이라는 행정구역이 설정된 것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이다. 주요한 교통로를 따라 행정구역이 설정되고 성곽이 축조되기도 하였다. 주요 행정구역별로 지방관이 파견되고, 군대 주둔이 이루어진 것도 이 무렵이다.
4세기 초의 고구려는 성곽을 중심으로 하는 입체적 방어체계와 일시에 수만 명의 병사를 동원할 수 있는 군사제도를 갖춘 나라로 모습이 바뀌게 된다. 317년 서진(西晉)이 멸망하고 중국 북방 유목민들의 이동과 정복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북중국은 큰 혼란에 빠져든다. 이른바 5호(胡)16국(國)시대의 시작이다. 미천왕(川王)은 이 틈을 타 동천왕 이후 숙원사업처럼 여겨졌던 요동 진출을 위한 준비를 다시 시작한다. 미천왕 을불은 큰아버지 봉상왕이 아버지 돌고에 이어 자신까지 죽일까 두려워 압록강 일대의 떠돌이로 살아간 적이 있다. 왕위에 오르자 오래지 않아 낙랑과 요동을 잇는 통로로 압록강 하구에 자리 잡은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는 떠돌이 시절 압록강 일대의 교통로를 훤히 익혔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낙랑, 대방과 요동 일부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고구려군에 항복한 것도 교통의 길목을 선점한 미천왕의 전략이 주효한 까닭이다. 330년대에는 송화(松花江) 유역의 부여도 병합하였다. 미천왕 시대에 이르러 한반도 서북의 곡창지대와 송화강 유역의 대평원이 모두 고구려의 영역이 된 것이다. 고조선과 부여의 옛 땅을 아우른 미천왕이 서쪽으로 눈길을 돌릴 즈음, 요동은 선비족의 일파 모용부가 세운 전연(燕)의 땅이 되어 있었다. 고구려는 중국 산동과 하북, 하남 일부를 차지하고 있던 후조(後趙), 선비(年)의 다른 일파인 우문부(宇部), 단부(部) 등과 연합하여 전연을 협공해 보았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도성마저 함락당하는 위기를 맞는다.
미천왕의 사후 고구려의 요동 진출이라는 국가적 과제는 고국원왕에게 넘겨졌다. 4세기 중엽 고구려와 선비족의 모용씨가 세운 전연은 요동과 부여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크고 작은 다툼을 벌였다. 전연은 섣불리 중원 진출을 시도하다가 고구려에 뒷덜미를 잡히고 싶지 않았고, 고구려로서는 수도 국내성으로의 길목을 지키면서 서방 진출의 교두보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던 까닭이다.

342년 전연의 모용황이 크게 군대를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고국원왕은 부여를 지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수도를 지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고구려가 길이 평탄한 부여성 방면의 북로(北) 수비에 치중할 것을 내다 본 전연군이 험한 남로를 넘어 국내성으로 직접 진격한 까닭이다.
왕궁이 불에 탔고 미천왕의 무덤이 파헤쳐졌으며 왕의 어머니와 왕비, 5만에 이르는 많은 백성이 전연으로 붙잡혀갔다. 전연과의 기세 싸움에서 밀리자 고구려는 서쪽 국경은 당분간 고정시키는 대신 남쪽으로 영역을 넓혀나가기로 하였다. 이와 같은 대외정책의 전환에는 전연과 계속 맞대응 할 경우, 전왕의 시신을 돌려받고 붙잡혀간 왕모와 왕비를 송환시키기는 어렵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그러나 369년 현재의 황해도 남부까지 내려갔던 2만 명의 고구려군은 북방진출을 도모하던 백제군과 맞닥뜨려 크게 패하고 만다. 오히려 371년에는 근초고왕과 그의 아들 근구수 왕자가 이끄는 백제의 북방 정벌군이 고구려군을 패배시키며 평양성까지 치달아 올라오는 사태를 맞는다. 진두에 나서 이를 막던 고국원왕은 백제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만다.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소수림왕은 시대와 국력에 걸 맞는 옷을 만들어 입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하였다. 서방의 문화와 철학, 종교가 하나로 버무려진 불교가 372년 고구려에 공식적으로 수용되었고, 나라 운영을 책임 질 관료를 양성하기 위한 고급교육기관인 태학이 세워졌다. 중국왕조들의 통치제도를 법률적으로 정비한 율령이 반포된 것도 소수림왕 통치 초기의 일이다. 고구려로 하여금 왕을 중심에 두고 국가의 모든 정책이 세워지고 펼쳐지는 나라가 되게 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이념이나 제도들이 마련된 것이다. 소수림왕의 뒤를 이은 고국양왕은 나라 사람들에게 불교를 잘 믿어 복을 받으라고 하면서 왕실의 조상신들을 모신 사당을 정비하게 하였다. 귀족가문들이 더 이상 천손(孫)을 자처하지 못하게 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왕실만이 신성한 권능을 지닌 천손족(天孫族)이라고 표방할 수 있었고, 유력한 귀족가문은 신성한 왕실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인정하게 하였다. 전통사상을 활용하여 왕권의 권위를 더욱 강화한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를 동아시아라는 보다 큰 무대의 주역으로 뛰어오르게 하기 위한 준비작업은 일단 마무리 되었다.

원고: 전호태(울산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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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4-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