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시민행복 특별시

통합검색
국가상징(태극기)

문화관광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고려시대

홈 문화관광 소중한 문화유산 인물 고려시대

인물_고려시대 상세보기
인물 조운흘(趙云 )
년도 1332(충숙왕 복위1) ~ 1404(태종 4) 연대 고려시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고려사]에 묘가 아차산 남록에 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본관은 풍양(豊穰), 호는 석간(石磵), 서하옹(西霞翁)이다. 평장사(平章事) 조맹의 후손으로, 흥안군(興安君) 이인복의 문인이다.

1357년(공민왕 6)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서기(安東書記)가 되었고, 합문사인(閤門舍人)을 거쳐 1361년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에 올랐다. 홍건적의 침입때 남쪽으로 피난하는 왕을 호종 하여 1363년 2등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국자감직강(直講)이 되고 이어 전라, 서해, 양광의 삼도안렴사(三道安廉使)를 지냈다.

1374년 전법총랑이 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상주 노음산(露陰山) 기슭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이라 하며 출입할 때는 소를 타고 다녔다. 이 때 [기우도찬(騎牛 圖讚)], [석간가]등의 작품을 지었다.

1377년(우왕 3) 다시 좌간의대부(左揀議大夫)에 기용되고,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있다. 가 1380년 사임하고 廣州(광주) 고원강촌으로 은퇴하였다. 그곳에서 자은사(慈恩寺)의 중 종림(宗林)과 친교를 맺으며 사평원, 판교원을 중수하고 스스로 원주(院主)라 칭하였다. 1388년 다시 전리판서에 기용되고, 이해 밀직제학(密直提學)에서 서해도관찰사로 나가 왜구를 토벌하였다.

이듬해 첨서밀직사사(簽西密直司事)를 거쳐 1390년(공양왕2) 계림부윤(鷄林府尹)을 지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강릉부사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신병으로 사직하고 광주로 내려갔다가 다시 검교정당문학(檢校政黨文學)에 임명되었다. 그 후 사직하고 광주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스스로 묘지(墓誌)를 짓고 73세에 죽었다. 저서로 [석간집]이 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편서로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이 전하고, 그 밖에 [동문선]에 5수의 칠언절구가 현전한다.

이전글, 다음글 보기
이전글 이전글이 없습니다.
다음글 다음글이 없습니다.

담당부서 : 문화예술과

담당자 : 구선옥

문의전화 : 031-550-2546

quick link

페이지 처음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