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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기상 세계속의 구리시 고구려의 기상으로 살기 좋은 도시의 꿈을 이루어 나가는 무한한 가능성의 도시 구리시를 소개합니다.

역사속의 구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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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시대

기원전3세기경

기원전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형성되었다. 삼한사회는 마한·진한·변한을 지칭하는데 지금의 구리 지역은 마한에 속하였다. 마한의 영역은 지금의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마한은 54개의 국(國)을 포용하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인 고리국(古離國)을 양주·풍양일대로 추정하는 학설이 있다. 이러한 위치추정은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아직 단정할 수 없다.

삼국시대

기원전18년경 지리적으로 백제의 서울 하북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396년(광개토왕 6년)

고구려는 백제에 대한 대규모 정벌을 감행하였는데 이 정벌에서 아차산이 함락 되었다.

475년(성왕 29년)

장수왕의 남진으로 고구려 영토로 확정되었다.
당시 북한산군(지금의 서울 지역)관내인 골의노현에 속했을 것으로 보인다.

551년(성왕 29년) 나·제 연합군이 한강유역을 공격하여 하류지역은 다시 백제의 땅이 되었다.

553년(진흥왕 14년)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을 공격하여 신라의 땅이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757년(경덕왕 16년)

지금의 서울지역은 한양군이었고 남양주시 진접, 진건일대는 황양으로 개칭 되었다.
삼국사기」백제 책계왕(286~297)조에 “왕이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하여 아차성(阿且城)을 수축하고 방비하였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를 통해서 이 시기에는 한강 하류지역이 백제의 땅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 371년 지금의 예성강인 패하와 평양성에서 백제와 고구려간의 전투가 벌어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해서도 구리지역을 포함한 한강 유역이 적어도 371년까지는 백제에 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396년(광개토왕 6)고구려 광개토왕은 백제에 대한 대규모 정벌을 감행하여 백제의 58개 성과 700개의 촌락들을 차지하였다. 「광개토왕비」에는 그때 고구려가 차지한 성들의 명칭이 나오는데 그 중에 ‘아차성’도 포함되어 있다. 이 아차성을 지금의 아차산에 있는 성으로 보는데에는 대부분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고구려군이 당시 백제의 도읍인 한성까지 육박한 것으로 보아 지금의 구리 지역과 한강 유역은 이때 고구려에 속하여 국경의 남단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475년(장수왕 63) 9월 고구려 장수왕은 3만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한번 백제를 공격하였다. 장수왕은 이때 백제의 도읍지였던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아차산에서 죽이는 한편 계속 남진하여 한강 이남의 넓은 지역을 고구려 판도에 넣었다. 이때 구리지역은 한산주(漢山州)에 속한 북한산군(北漢山郡 : 지금의 서울지역)관내인 골의노현(骨依奴懸)에 속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후 한동안 한강 하류지역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는데, 551년(성왕 29) 신라와 백제 연합군이 한강유역을 공격하여 이를 차지함으로써 한강하류지역은 다시 백제의 땅이 되었다. 그러나 불과 2년 후인 553년(진흥왕 14)에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을 공격하여 이지역은 또다시 신라의 영역으로 바뀌었다. 신라는 757년(경덕왕 16) 북한산군 지역에서 한양군을 설치하고 현 남양주시 진접ㆍ진건지역을 골의노현에서 황양(荒壤)으로 개칭하였다. 황양은 한양군에 속하였는데, 지금의 구리지역도 이곳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후삼국시대

898년 "양주"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난다

고려시대

983년(성종 2년) 양주목이 되었다.

995년(성종 14년)

양주는 관내도(경기,황해도지역)에 속하였으며 양주를 좌신 책군, 해주를 우신책군이라 칭하고 좌우 2보로 삼았다.

1012년(현종 3년) 안무사를 두었다.

1018년(현종 9년) 지주사로 강등되었다.

1067년(문종 21년)

남경유수관으로 승격되었다가 곧이어 격하되고 숙종때 남경으로 다시 승격 되었다.

1308년(충선왕즉위)

남경은 한양부로 격하되었다.
고려시대 현 구리지역은 양주 또는 남경 관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양주의 변화를 살펴보면 통일신라시대 한양군이었던 지금의 서울지역은 고려 초기 양주라는 명칭으로 바뀐다. 그 뒤 983년(성종 2) 12목 지방제도를 만들때 양주목(牧)이 되었다. 995년(성종14) 다시 지방제도의 개편을 실시하여 10도제와 12절도사제로 개편될 때, 이때 양주는 관내도(경기, 황해도지역)에 속했다. 이때 고려 조정은 양주를 좌신책군(左神策軍), 해주를 우신책군(右神策軍)이라하여 좌우 2보(輔)로 삼았다. 1012년(현종 3)에는 2보와 12정도사를 폐지하고 안무사(安撫使)를 두었으나 1018년(현종 9) 양주는 다시 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된다. 그 후 1067년(문종 21) 남경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되었다가 곧이어 격하되고 숙종 때 다시 남경으로 승격된다. 이때 구리지역도 남경의 직할지가 되었다. 이후 1308년(충선왕 즉위)남경은 한양부(漢陽府)호 격하되었다. 고려시대 현 구리지역의 보다 자세한 연혁은 아직까지는 알 수 없다.

조선시대

1394년(태조3년)

지금의 서울지역인 한양부에 도읍이 들어서면서 한성부라 개칭하고 양주의 치소를 아차산 남쪽 대동리로 옮겼다. 지양주사로 강등되었다.

1395년(태조4년) 양주부로 승격되었다.

1397년(태조6년) 양주의 치소를 고주내(지금의 양주군 고읍리)로 옮겼다.

1410년(태종10년) 양주목으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13년) 양주도호부로 강등되었다.

1466년(세조12년) 양주목으로 승격되었다.

1504년(연산군10년) 양주목을 폐지하고 왕의 사냥터를 만들었다.

1506년(중종1년)

양주목으로 복구되고 치소를 불곡산 남쪽 (지금의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으로 옮겼다.

1530년(중종25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구지"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였다. 구지면에 속한 리로 사노리, 인장리,수택리, 백교리, 토막리, 동창리, 이문리, 평촌리, 아차동, 우미천리 등 10개리가 있었다.
1394년(태조 3) 지금의 서울이 조선의 도읍으로 자리잡으면서 한양부는 한성부라 개칭되고 양주의 치소는 아차산 남쪽 대동리로 옮겨졌다. 이 대동리는 지근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지역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지근의 구리지역과 당시의 양주의 치소는 아차산을 사이에 두고 자리하고 있던 셈이다.이후부터 현 구리지역의 연혁은‘양주’의 한부분이 되어 변화한다.
이때 양주의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되었다. 1395년(태조 4) 양주부로 다시 승격되었고, 2년 뒤인 1397(태조 6)양주의 치소가 고주내(현 양주군 고읍리)로 옮겨졌다. 1410년(태종 10) 양주목으로 승격되었다가 1413년(태종 13)에는 양주도호부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1466년(세조 12)에 다시 양주목으로 승격되었고 풍양현을 속현으로 두었다. 1504년(연산군 10)에 양주목을 폐지하고 왕의 사냥터로 만들었으나, 1506년(중종 1)다시 양주목으로 복구되고 치소를 불곡산 남쪽(지금의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유양리는 양주의 관아가 있는 중심지로 자리잡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유양리에서 지금의 구리지역까지는 약 40~60리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현재에도 익숙한 구지(龜旨ㆍ九旨)라는 명칭은 1530년(중종 25)에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나온다. 이후에도 구지면은 계속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1912년 발간된 「구한국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에는 일제에 강제 합병되기전 양주군에 편제되어 있던 32개 면이 나와 있다. 그리고 각 면에 속한 마을도 나와 있는데 이에 의하면 구지면은 사노리(四老里)등 10개 마을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10개 마을은 조선중기 이래 구지면을 구성하고 있던 기본적인 마을이었다.

일제강점기

1914년

구지면의 「사노리, 인장리, 수택리, 백교리, 토막리, 동창리, 이문리, 평촌리, 아차동, 우미천리」등 10개 리와 망우리면의 「묵동리, 신현리, 능후동, 방축리, 직곡리, 봉황동, 내동리, 능내동, 양원리, 입암리, 봉현리, 상리, 중리, 하리, 능곡리등 15개리 그리고 노원면의 「장기리와 갈매동」미음면「수변리와 석도리 각 일부」 진관면「배양동 일부」 별비면 「퇴계원리」 일부를 병합하여 구지의 "구(九)"자와 망우리의 "리(里)"자를 따서 구리면이라 하였다. 새로 만들어진 리로는「묵동리, 중하리, 상봉리, 신내리, 망우리, 인창리, 사노리, 교문리, 수택리, 토평리, 아천리, 갈매리」등이다.
일제는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후 1914년에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현 명칭인‘구리’는 이때 생겨났다. 즉, 이때의 행정구역 통·폐합시 구지면의 사노리, 인장리, 수택리, 백교리, 토막리, 동창리, 이문리, 평촌리, 아차동, 우미천리 등 10개 리와 망우리면의 묵동리, 신현리, 능후리동, 방축리, 작곡리, 봉황동, 내동리, 능대동, 양원리, 입암리, 봉현리, 상리, 중리, 하리, 능곡리 등 15개리 그리고 노원면의 장기리와 갈매동, 미음면, 수변리와 석도리 각 일부, 진관면 배양동 일부, 별비면, 퇴계원리 일부를 병합하여 구지면의‘구’자와 망우리면의‘리’자를 따서 구리면 이라 하였다. 개편된 구리면에는 묵동리, 중하리, 상봉리, 신내리, 망우리, 인창리, 사노리, 교문리, 수택리, 토평리, 아천리, 갈매리등 12개 마을이 편제되었으며, 면사무소는 교문리에 두었다.

대한민국

1963년 1월 1일

묵동, 중화, 상봉, 신내, 망우등 5개리가 분리되어 서울시에 편입 되었다.
양주군 구리면은 인창리, 사노리, 교문리, 수택리, 토평리, 아천리, 갈매리등 7개리로
편제되었다

1973년 7월 1일 구리읍으로 승격되어 양주군에 그대로 편제되었다.

1980년 4월 1일

양주군에서 분리되어 남양주군에 소속되었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구리면은 해방이후에도 별다른 변화 없이 행정편제는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면사무소가 완전 파괴되어 1952년 4월 이후부터는 망우리에 면사무소를 두었다. 1955년 8월 10일에 구리면사무소가 인창동의 옛 구리시청 자리에 신축되었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하여 구리면의 묵동, 중하, 상봉, 신내, 망우 등 5개 리가 분리되어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구리면에는 인창리, 사노리, 교문리, 수택리, 토평리, 아천리, 갈매리 등 7개 리만 남았는데 이로써 구리면은 그 지역적 범위가 일제시대 이전의 ‘구지면’과 거의 같게 되었다.
구리면은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3호에 의하여 읍으로 승격되었다. 군편제에서는 그대로 양주군에 속해 있다가 1980년 4월 1일 법률 제3169호에 의하여 양주군에서 분리된 남양주군에 소속되었다. 구리읍은 해마다 인구가 증가하고 발전을 거듭하여 1986년 1월 1일 법률 제 3798호에 의해 남양주에서 분리되어 시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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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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