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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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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의 유래1

한양성은 풍수지리 형세상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과 남쪽의 남산 (목멱산)이 각각 동서남북을 둘러싸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형세가 형성되기 전에 어떤 산이 한양성의 안산(案山)이요, 동서남북의 남쪽 주작을 이루는 산이 되려고 한양을 향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오는 도중에 지금의 아차산 자리에 이르러 한양 쪽을 보니 이미 그 자리에 종남산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산이 그 자리에 퍼져 ‘아차’ 했다 하는 것에서 아차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아차산의 유래2

나라에 난리가 일어나자 어떤 우국지사가 의병을 모집해서 서울을 지키려고 쫓아 들어왔는데 막 아차울 고개를 올라서서 보니 이미 서울은 함락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이 우국지사는 ‘아차 늦었구나!’라고 하면서 탄식을 했다고 하는 데에 아차라는 유래가 나왔다.

아차산의 유래3

옛날에 삼청동에 점을 잘 친다는 사람이 있어서 임금이 그 사람을 불러들였다. "네가 점을 잘 친다고 하니 한번 쳐봐라." 해놓고는 통 속에 쥐 한 마리를 감춰 놓고서 "이 안에 있는 쥐가 몇 마리냐?"하고 물었다. 이에 그 점쟁이는 세 마리가 들었다고 대답했다. "나쁜 놈! 한 마린데 세 마리가 들었다고 하니 이 놈을 죽여버려라."라고 임금이 말했다. 여러 장정이 달려들어서 그 점쟁이를 붙잡아 나간 후 임금이 이상해서 쥐를 잡아 배를 갈라보니 새끼가 두 마리 있었다. 그래서 임금은 사람을 급히 보내 죽이지 말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죽이지 말라고 달려가면서 손을 들어 표시하는 것을본 백정이 빨리 죽이라는 줄 알고 죽여버렸다. 그래서 거기에서 아차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장자늪

옛날 장자못에 장자(부자)가 살았는데, 아주 심통이 많고 고약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장자의 집에 도사가 와서 저녁 때 염불을 하고 시주를 구했다. 주인인 장자는 어떻게나 심사가 고약한지 외양간에서 무럭무럭 김이 나는 똥을 넉가래로 푹 퍼서 "옛따 이거나 가져가거라." 라고 하였다. 그러자 도사가 "참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며 받아가지고 돌아가는데, 그 근처에 우물늪에서 그 집 며느리가 저녁쌀을 씻다가 칠바가지에다가 김이 무럭무럭 나는 쇠똥을 받아가는 도사를 보고 "스님! 스님! 이리로 오십쇼." 불러서는, 그 쇠똥을 훌렁 쏟아버리고 우물을 떠서 바가지를 부시고 저녁쌀을 씻어 놓은 것을 손으로 한 움큼 떠서 "이걸 가져가세요." 하였다. 그 도사가 가만히 생각하니 그 집에는 며느리밖에 쓸모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 가다가 돌아서서 "젊은 댁은 날 따라 오라. 그리고 집에서 무슨 일이 있던지 돌아보지 말아라." 이렇게 당부를 하고 돌아가는데 우미천을 지나가다가 별안간 뇌성벽력이 치면서 굵은 비가 막 쏟아지는 것이었다. 이때, "아이쿠 장독을 안 덮었네." 하고 며느리가 돌아보다가 그대로 돌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 뒤 그 돌에 일 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지금은 길 넓히는 공사를 하다가 그 돌을 불도저가 밀어 한강으로 빠졌다고 한다.

건원릉의 갈대

동구릉에는 태조 이성계의 능을 비롯하여 여러 왕과 왕비의 능이 아홉 개가 있어 동쪽의 아홉 능이라는 뜻으로 동구릉이라고 한다. 동구릉 중에서 태조의 능인 건원릉의 봉분에 입힌 떼는 갈대인데, 함흥에서 날라다가 입혔다고 한다. 이는 태조가 고향의 흙에 묻히지 못하자 떼만이라도 고향인 함흥의 갈대로 덮기를 원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함흥과 서울 사이의 거리는 천리나 되어 지금 같으면 한나절이면 갈대를 가져 올 수 있으나 당시에는 아무리 빨리 나른다고 해도 보름이 걸렸다. 그런데 보름동안 갈대가 말라 죽을 염려가 있었으므로 서울과 함흥을 사람이 일렬로 연결하여 릴레이식으로 갈대를 하루 만에 날랐다고 한다. 그런데 건원릉에 입힌 갈대가 가끔 말라 죽어서 딴 데서 난 갈대로 입히면 그 갈대는 자라지 못하고 말라 죽었다. 그래서 함흥에서 자란 갈대로만 입혔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한양까지 쳐들어와서 능을 약탈하려 했는데, 능에 불을 지르면 어디에선가 바람이 불어와서 불을 꺼버렸다. 이렇게 몇 차례나 불을 다시 지르려했지만 계속 바람이 불어와서 불을 꺼버렸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있자 왜군들은 감히 건원릉에 접근도 못하고 있었는데, 밤에는 능의 비석이 장수가 되고 갈대는 군사가 되어 능 인근 왜병의 진영을 치니 왜병들이 무서워 달아났다고 한다.

망우리의 유래

망우리에 정씨가 살고 있었다. 그 정씨는 조상이 있었는데 그 조상은 태조와 같이 동문수학하던 사이로 상당히 친하게 지냈다. 어느 날 정사에 골치가 아프던 태조가 자기가 묻힐 자리나 찾는다고 돌아다니다가 지금의 동구를 자리를 찾아냈다. 묘 자리를 정해 놓고 흐뭇해하던 태조는 동문수학하던 정씨의 조상집이 가까이에 있어 그 집에 가서 "이제 나 후세에 들어갈 자리를 마련해 놨으니까 이내 모든 시름을 잊었다네."라고 말한 후 그 다음부터 걱정을 잊었다는 의미로 망우리라고 했다 한다.

대성암 쌀바위

지금의 대성암 자리는 삼국시대 신라의 유명한 승려인 의상대사가 도를 닦던 곳이었다 한다.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수도를 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대사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찾아왔다고 하는데 수도 자리 뒤의 바위구멍에서 쌀이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공양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밥을 짓는 사람이 하늘이 내려준 이 천공미를 좀더 많이 얻고자 욕심을 부려 바위구멍을 더 크게 넓히려고 하자 쌀이 하나도 나오지 않고 쌀뜨물과 타버린 쌀이 수삼일 동안 나오다가 멎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다시는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정보담당자 : 문화예술과 / 구선옥

전화 : 031-550-2546

최종수정일 : 2017-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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